회색을 버리기보다 다시 읽기: 빛·언더톤·재료가 만드는 중립

회색 벽은 오랫동안 ‘안전한 선택’의 대명사였다. 어떤 가구와도 충돌하지 않고, 공간을 과하게 규정하지 않으며, 실패 확률이 낮아 보인다. 그러나 이 기사는 바로 그 “안전함”이 때로는 공간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 수 있다는, 현장 디자이너의 다소 직설적인 문제 제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2026년 1월 16일 House Beautiful에 실린 글에서 디자이너 Jay Jenkins는 고객이 가장 자주 요구하는 것들 중 자신이 가장 덜 반기는 요청이 “방 전체를 회색으로 도배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특히 중간 톤의 회색(mid gray) 은 “너무 밋밋하고 영감이 없으며”, 산업·상업 공간의 납(lead)을 연상시키는 질감으로 읽힌다는 지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글이 회색을 ‘금지색’처럼 선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Jenkins는 회색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맥락이 바뀌면 회색은 충분히 기능적이고 설득력 있는 배경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차고처럼 오염과 생활 흔적이 축적되는 장소에서는 톤을 낮춘 뮤트 그레이 가 구석과 바닥의 “수많은 흠”을 감춰주고, 물건이 쌓이기 쉬운 환경에서 시각적 소음을 정리하는 ‘디자인적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즉, 논점은 “회색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회색을, 어떤 목적과 상황에서 쓰느냐에 가깝다.

그가 특히 문제 삼는 것은 ‘회색의 중립성’이라는 통념이 실제로는 얼마나 섬세한 조건 위에 서 있는가이다. Jenkins는 녹색이나 갈색 계열의 언더톤(undertone)이 결여된 회색 을 “평평(flat)하고 다른 색과 잘 섞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색채를 단지 “명도·채도·색상”의 3요소로 환원하기 어려운 이유를 환기한다. 벽면색은 면적이 크고, 자연광·인공광의 스펙트럼 변화에 민감하며, 주변 재료(목재, 패브릭, 금속)의 반사색을 끌어안는다. 따라서 언더톤이 빈약한 회색은 ‘아무것도 아닌 배경’이 되기보다, 오히려 공간 전체를 한 겹의 무표정한 필터로 덮어 재료의 결을 죽이고, 색 조합의 여지를 좁히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기사의 메시지는 이 지점을 직감적으로 짚는다.

패트릭 빌러. 이 이층방에서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앨리슨 윌슨(Allison Wilson)이 밋밋한 회색보다 조금 더 카리스마가 있는 벤자민 무어(Benjamin Moore)의 피드몬트 그레이(Piedmont Grey)를 활용.

그래서 제안되는 대안이 그레이지(greige) 다. Jenkins는 회색을 쓰고 싶다면, 회색이 녹·갈 계열로 기우는 그레이지가 훨씬 “섞이기 좋고” 결과적으로 더 풍부한 중립성에 도달한다고 말하며, 그레이지를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꼽는다.
여기서 그레이지는 단순히 ‘회색 대신 베이지’라는 타협이 아니다. 오히려 중립을 만든다는 행위가 얼마나 적극적인 선택인지를 드러낸다. 무채색에 가까운 회색은 종종 ‘정지된 스크린’처럼 공간의 온도를 낮추지만, 그레이지는 미세한 색온(色溫)과 재료감의 공명을 통해 공간을 “살아 있게” 만든다. 말하자면, 무난함이 아니라 조율된 중립이다.

기사 말미의 “피이지(peige: pink+beige)” 같은 사례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베이지에 핑크를 섞어 새로운 중립을 만든다는 발상은, 뉴트럴이 결코 무색무취가 아니라 정서적 방향성을 가진 설계 언어임을 보여준다. 회색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이제는 뉴트럴조차 “아무 색도 아닌 색”이 아니라 “의도된 분위기”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전환의 감각이다.

결국 이 글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왜 그렇게 쉽게 회색을 ‘정답’으로 상정했는가. 그리고 그 회색은, 정말로 중립이었는가. 어쩌면 회색 벽에 대한 피로는 특정 색에 대한 유행의 반작용이 아니라, 공간을 ‘안전하게’ 만들려는 선택이 오히려 공간의 감각을 평평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경험적 학습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회색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회색을 포함한 모든 뉴트럴을 맥락(공간 기능), 빛(조도·색온도), 언더톤(혼색의 방향), 재료(질감과 반사) 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는 것-이 기사는 그 재독(再讀)을 촉구한다.

 


출처 : www.housebeautif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