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유행은 언제나 시대의 정서를 반영한다. 2026년 Benjamin Moore가 발표한 올해의 색은 ‘Silhouette AF-655’. 이름처럼 실루엣의 세계에 속한 이 색은 검은빛에 가까운 브라운, 혹은 에스프레소와 차콜이 뒤섞인 듯한 깊은 중간색이다. 강렬한 대비 대신 여운을 남기는 색,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품격을 감추는 색이다.
이 어두운 색의 등장은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정서적 피로와도 맞닿아 있다.
Benjamin Moore의 색채 디렉터 Andrea Magno는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sustainable beauty)”에 대한 갈망을 언급한다. 너무 자주 바뀌는 미세 트렌드, SNS에서 하루아침에 소멸되는 색의 유행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색’을 찾는다. Silhouette은 바로 그 반동의 결과로, 트렌드의 가속을 견디는 색이라 할 수 있다.
이 색은 또한 패션과 인테리어의 경계가 흐려지는 문화적 징후를 상징한다. 최근 몇 년간 맞춤 정장(suiting)과 구조적 패브릭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데, Silhouette은 마치 잘 재단된 울 수트처럼 견고하면서도 부드럽다. 공간을 감싸는 벽의 색으로 쓸 때에는 단단한 프레임처럼 안정감을 부여하고, 밝은 중립색(예: Swiss Coffee 0C-45)과의 조합에서는 깊이를 더한다. 즉, 이 색은 배경이 아니라 ‘구조를 형성하는 색’으로 기능한다.
학문적으로 보자면, 이는 색채의 사회심리학적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다. 2020년대 초반 인테리어 트렌드가 ‘힐링’, ‘자연 회귀’, ‘웰니스’ 등의 키워드 아래 밝은 뉴트럴·파스텔 계열로 움직였다면, 2026년의 Silhouette은 그 반대편에서 ‘심리적 중력(psychological gravity)’ 을 회복하고 있다. 색의 명도와 채도가 낮아질수록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사유와 정서를 머물게 한다. 이는 팬데믹 이후 지속된 ‘정신적 속도 조절’의 디자인적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Silhouette은 단순한 중립색이 아니다. 공간을 채우는 동시에, 그 안의 사물들을 더 선명히 드러나게 만드는 조용한 조명 역할을 한다. Benjamin Moore가 “공간의 무드(mood)를 만드는 색”이라 칭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각적으로는 후퇴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무게중심을 제공하는 색이다.
2026년의 색은 ‘드러남보다 머무름’의 미학을 말한다. 화려한 트렌드가 피로를 낳은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묵직한 색으로 돌아와 자신을 감추며 공간 속에 안정을 구축한다. Silhouette AF-655는 그 상징적 코드로서, 색채가 시대의 무드이자 정서적 구조물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