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 간판이나 제품 포장에서 기업 이름을 가려도 색만으로 브랜드를 알아보는 경우가 있다. 오랫동안 반복해 사용한 색은 로고나 상호와 함께 브랜드의 인상을 형성한다. 소비자가 특정 색을 보고 상품이나 기업을 떠올릴 정도가 되면 그 색도 상표로 보호받을 수 있다. 이를 색채상표(color mark)라고 한다.
색채상표는 문자나 도형 없이 하나의 색 또는 여러 색의 조합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출처를 구분하는 상표다. 일반적인 상표가 이름과 로고를 중심으로 브랜드를 식별한다면, 색채상표는 시각적 인상이 소비자의 기억에 남는다는 점을 활용한다. 기업이 일관된 색을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그 색과 브랜드 사이에 강한 연관성을 형성했을 때 법적 보호의 가능성도 커진다.
그러나 같은 빨간색을 사용하더라도 모든 기업이 색채상표로 등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색은 문자나 도형과 달리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특정 기업이 널리 쓰이는 색을 독점하면 다른 기업의 디자인과 영업 활동을 지나치게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색이 상품의 기능이나 용도를 설명하는 경우에도 상표 등록이 어렵다. 안전조끼의 주황색처럼 눈에 잘 띄어야 하는 기능을 수행하거나, 제품의 성질을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색을 한 기업의 권리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다섯 개 시장, 서로 다른 기준
세계 5대 상표기관 협의체인 TM5는 2026년 5월 색채상표 출원 요건을 비교한 통합 가이드를 발표했다. TM5에는 한국 지식재산처(MOIP), 미국 특허상표청(USPTO), 유럽연합 지식재산청(EUIPO), 일본 특허청(JPO), 중국 국가지식산권국(CNIPA)이 참여한다. 이들 기관이 담당하는 출원은 전 세계 상표 출원의 약 60%에 이른다.
이번 가이드는 색채상표의 정의와 분류, 단일 색의 등록 가능성, 식별력 판단, 출원 도면과 색의 설명 방식 등 21개 항목을 비교한다. 사진과 컴퓨터 설계 도면 가운데 어떤 형식을 인정하는지, 색만 보호받으려 할 때 제품의 형태를 권리 범위에서 어떻게 제외해야 하는지도 다룬다.
색채상표를 인정하는 범위는 국가마다 다르다. 한국과 미국, 유럽연합, 일본에서는 하나의 색만으로 이루어진 상표를 출원할 수 있지만, 중국은 단일 색을 독립된 색채상표로 인정하지 않는다. 여러 색을 결합한 상표의 출원 방식과 색을 표시하는 기준도 각 기관의 제도에 따라 달라진다. 한 국가에서 등록된 색채상표가 다른 국가에서도 같은 범위로 보호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색만으로 브랜드를 구분할 수 있는가
색채상표 심사에서 중요한 기준은 식별력(distinctiveness)이다. 소비자가 그 색을 장식이나 제품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니라 특정 기업의 표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새롭게 선택한 색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별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일관되게 사용한 기록과 광고, 매출, 시장점유율, 소비자 인식조사 등을 통해 색과 브랜드의 관계를 입증해야 할 수 있다.
제품에 사용한 색의 위치도 중요하다. 상자 전체를 채운 파란색과 신발 밑창에만 적용한 빨간색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식된다. 전자는 색 자체가 브랜드를 나타낼 수 있지만, 후자는 색과 위치가 결합해 식별 기능을 한다. 출원서에는 보호하려는 색과 적용 위치, 상품 형태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색을 수치나 표준색 체계로 정확하게 특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출원인이 말하는 ‘빨간색’이 주홍색에 가까운지, 자주색이 섞인 진홍색인지에 따라 권리 범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화면과 인쇄물, 재료와 조명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인다는 점도 색채상표 출원을 어렵게 만든다. 색의 명칭만 제시하기보다 색상 코드와 견본, 적용 방식을 함께 설명해야 실제 사용과 등록 내용 사이의 차이를 줄일 수 있다.
색채 전략과 상표 전략의 연결
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에는 국내에서 사용한 색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진출하려는 국가에 비슷한 색채상표가 이미 등록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해당 국가가 단일 색과 색의 조합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색의 사용 방식이 현지에서 상품의 기능이나 업종의 관행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등록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
브랜드를 처음 개발할 때부터 색채 디자인과 상표 전략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로고에 색을 입히는 단계에 머물지 않고, 제품과 포장, 매장, 광고와 디지털 화면에서 같은 색을 어떻게 일관되게 사용할지 계획해야 한다. 색의 사용이 축적될수록 소비자는 그 색을 브랜드와 연결해 기억한다. 이러한 경험이 충분히 쌓여야 색은 미적 표현을 넘어 상품과 기업을 구분하는 표지가 된다.
TM5의 가이드는 다섯 기관의 제도를 하나로 통일한 규정이 아니다. 각 나라에서 무엇을 색채상표로 인정하며 어떤 자료와 표현 방식을 요구하는지 비교할 수 있도록 정리한 안내서다. 기업에는 하나의 색을 선택하는 일만큼 그 색을 어디에, 얼마나 오래,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브랜드의 색은 디자인으로 시작하지만, 일관된 사용과 소비자의 기억을 거쳐 비로소 보호할 수 있는 권리로 발전한다.
출처: 특허뉴스, 「같은 빨간색, 다른 상표 전략…TM5, 색채상표 출원 글로벌 가이드 공개」, TM5, “Comprehensive Guide for Color Mark Application Requir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