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Blue Stairs에 적용한 8가지 색채 시뮬레이션
동일한 계단공간에 서로 다른 색채를 적용해 주의, 안전감, 가시성, 웨이파인딩 등 공간지각의 차이를 비교한 이미지.
빨강은 ‘주의’, 파랑은 ‘안전’이라는 공식 너머
공공공간의 색을 계획할 때 우리는 종종 색에 고정된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빨강은 주의를 끌고, 파랑과 초록은 편안하거나 안전하며, 회색은 중립적이라는 식이다. 이러한 설명은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 공간에서 색이 작동하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2026년 9월 학술지 Frontiers in Built Environment에 발표된 연구는 이러한 문제를 실제 대학 캠퍼스의 동선공간을 대상으로 살펴보았다. 연구진은 이스탄불 아이딘대학교(Istanbul Aydın University)의 ‘블루 스테어스(Blue Stairs)’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기존 계단 공간의 색을 여덟 가지 대안으로 디지털 시뮬레이션했다. 그리고 실내건축 전공 학생 151명에게 각 색이 주의, 가시성, 안전감, 미적 기여, 기분, 웨이파인딩, 공간감 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평가하도록 했다.

Blue Stairs에 적용한 8가지 색채 시뮬레이션
결과만 보면 익숙한 색채심리의 설명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빨강은 주의를 끄는 정도와 가시성에서 가장 높은 선택을 받았다. 유효응답 가운데 약 53%가 빨강을 주의와 가시성에 가장 잘 연결되는 색으로 선택했다. 반면 파랑은 안전감에서 51.4%, 미적 기여에서 50.3%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 초록 역시 안전감과 긍정적 기분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색으로 나타났다. 회색은 주변환경과의 조화 및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는 중립적 배경과 관련되었고, 노랑은 공간을 넓게 느끼게 하는 특성과 상대적으로 강하게 연결됐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 더 주목할 부분은 개별 색의 순위가 아니다.
연구 결과에서 모든 평가항목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하나의 색은 존재하지 않았다. 빨강은 주의를 끄는 데 강했지만 안전감이나 조화의 측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파랑은 안전과 미적 평가에서 유리했지만 주의를 집중시키는 역할에서는 빨강과 다른 위치를 차지했다. 회색과 노랑 역시 각각 다른 지각적 기능을 보였다. 즉 색의 효과는 ‘어떤 색이 좋은가’라는 질문보다 ‘이 공간에서 무엇을 지각하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결과는 환경색채를 선호도의 문제에서 기능의 문제로 바꾸어 생각하게 한다.
계단의 단차나 위험요소를 즉각 인지시켜야 한다면 주의와 가시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반대로 장시간 머무르는 휴게공간이라면 안전감과 정서적 안정, 주변환경과의 조화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복잡한 건물에서 사람들의 이동을 유도해야 한다면 웨이파인딩과 색 대비가 핵심이 된다. 같은 파랑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목적에 따라 적절성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환경색채의 계획 기준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축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Attention – Safety – Wayfinding – Harmony.
Attention은 얼마나 빠르게 주의를 끄는가의 문제다.
Safety는 공간을 얼마나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느끼게 하는가와 관련된다.
Wayfinding은 색이 위치와 방향을 구분하는 정보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가를 의미한다.
Harmony는 건축물과 주변환경, 재료와 다른 색 사이의 관계에서 얼마나 자연스러운 통합을 만드는가를 다룬다.
중요한 것은 이 네 가지가 항상 같은 색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비상구나 위험구간에서는 조화보다 가시성이 중요할 수 있고, 병원이나 도서관의 휴게공간에서는 강한 주의환기보다 안전감과 정서적 안정이 우선될 수 있다. 공항이나 복합상업시설에서는 색의 아름다움보다 서로 다른 공간을 빠르게 구별할 수 있는 정보 구조가 더 중요하다. 환경색채는 결국 하나의 ‘좋은 색’을 찾는 일이 아니라 공간의 우선 기능에 따라 색의 역할을 배분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 연구는 흔히 사용되는 “빨강은 위험”, “파랑은 안정”, “초록은 편안함”과 같은 색채심리의 단순한 공식에도 주의를 요구한다. 연구진 역시 이번 결과를 색이 실제 행동을 유발했다는 인과적 증거로 해석하지 않는다. 참가자들이 디지털 이미지에서 각 색과 특정 공간적 속성을 어떻게 연관시켰는지를 조사한 자기보고식 지각 연구이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 역시 하나의 대학, 하나의 계단 공간, 디자인 교육을 받은 학생 집단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더구나 연구 대상이 원래 ‘블루 스테어스’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공간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기존 공간에 대한 기억과 장소정체성이 파랑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면서 향후 가상현실, 시선추적, EEG, 행동관찰, 다양한 문화권을 대상으로 한 반복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색은 건축의 마지막 단계에서 표면을 장식하는 요소가 아니라 주의를 조절하고, 공간을 구분하고, 이동을 돕고, 안전감을 형성하는 환경정보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색채계획은 “사람들이 어떤 색을 좋아하는가”라는 선호도 조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먼저 봐야 하는가.
어디에서 속도를 줄여야 하는가.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가.
어떤 공간에서는 머물고 싶어야 하는가.
그리고 주변환경과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이 먼저 결정된 뒤 색이 선택되어야 한다.
결국 이 연구가 보여주는 핵심은 단순하다.
공공공간에 가장 좋은 색은 없다. 좋은 색채계획은 있을 뿐이다.
환경색채의 핵심은 특정 색의 보편적인 심리효과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목적과 사용자의 지각 경험에 따라 Attention–Safety–Wayfinding–Harmony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이다. 색을 ‘선호의 대상’에서 ‘공간을 작동시키는 설계변수’로 바라볼 때, 환경색채는 장식에서 벗어나 보다 근거 기반의 디자인 전략으로 발전할 수 있다.
참고 논문
Sözer, E., Yılmaz, E., & Caymaz, G. F. Y. (2026). Investigating the relationship between colour and visual perception in campus circulation spaces: a data-informed exploratory framework. Frontiers in Built Environment, 12, 1928896.
DOI: 10.3389/fbuil.2026.1928896
2026년 9월 7일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