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색을 물질의 속성으로 생각한다. 빨간색에는 붉은 안료가 있고, 파란색에는 푸른 안료가 있으며, 흰색에는 흰 안료가 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러나 최근 교토대학교(Kyoto University) 연구진이 발표한 구조적 백색(structural whiteness) 연구는 이러한 익숙한 색채관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흰색이라고 보는 곳에는 반드시 흰색 물질이 있어야 할까.

이 질문을 생각하기에 좋은 작품이 가쓰시카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The Great Wave off Kanagawa)》다. 거대한 파도의 끝에서 부서지는 하얀 포말, 멀리 보이는 후지산의 눈, 하늘의 밝은 부분을 자세히 보면 흰색 안료를 칠해서 표현한 것이 아니다. 교토대학교 연구진이 연구 발표에서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인쇄하지 않고 남겨둔 화지(washi)의 섬유 구조에서 빛이 산란되면서 우리 눈에는 밝은 흰색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구조적 백색(structural whiteness)​이라고 한다. 백색 물질이 가시광선을 흰색으로 ‘발색’하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구조 내부에서 여러 파장의 빛이 폭넓게 산란되면서 결과적으로 흰색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연에서 이러한 백색은 낯설지 않다. 눈과 구름, 바다의 포말이 대표적이다. 눈이 하얀 것은 얼음 자체가 흰색이기 때문이 아니다. 작은 얼음 결정과 공기 사이의 수많은 경계에서 빛이 여러 방향으로 산란되기 때문이다. 구름과 바다의 거품 역시 물과 공기가 복잡하게 만나는 구조 속에서 가시광선이 광범위하게 산란되면서 밝은 백색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식물 조직이나 동물이 만드는 거품 구조 등에서도 이와 유사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백색을 안료 없이 만드는 방법

교토대학교 iCeMS의 에아산 시바니아(Easan Sivaniah) 교수 연구팀은 이러한 자연의 원리를 재료 기술에 적용했다. 도쿄도립대학교(Tokyo Metropolitan University), 둥화대학교(Donghua University) 연구진과 함께 빛을 산란시키는 미세한 다공성 구조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강한 백색을 구현했다.

연구팀이 개발한 기술은 딥 폼 포토리소그래피(Deep Foam Photolithography, DFP)​다. 먼저 빛을 이용해 고분자 내부의 분자 구조를 변화시키고, 이후 비교적 약한 용매로 처리하면 재료가 팽창하면서 내부에 미세한 구멍이 많은 다공성 구조가 형성된다. 이 공기와 고분자의 복잡한 경계가 빛을 여러 방향으로 산란시키면서 흰색 안료가 없어도 밝은 백색이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색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표면에서는 매우 거친 미세구조가 형성되어 연잎과 비슷한 강한 발수성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하나의 미세구조가 내부에서는 백색을 만들고, 표면에서는 ​물을 튕겨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연구진은 이 기술을 필름뿐 아니라 직물에도 적용했으며 최대 약 20,000 DPI 수준의 고해상도 패터닝이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무엇보다 흰색을 만들기 위해 이산화티타늄(TiO₂)을 첨가하거나 발수성을 위해 PFAS 계열 물질을 사용하는 기존 방식과 다른 재료 설계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연구 결과는 2026년 9월 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됐다.

연백에서 티타늄화이트까지, 백색의 첫 번째 역사

이 연구가 색채인문학에서 흥미로운 이유는 기술적 성과만이 아니다. 오히려 백색의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통적인 색채사는 주로 안료의 역사였다. 어떤 시대에 어떤 색을 만들 수 있었으며, 그 색을 어떤 물질에서 얻었는지를 중심으로 설명해 왔다.

백색도 마찬가지다. 백악(chalk)과 석회(lime), 오랫동안 서양 회화의 대표적인 흰 안료였던 연백(lead white), 근대에 등장한 아연백(zinc white), 그리고 20세기 이후 대표적인 산업용 백색 안료가 된 티타늄화이트(titanium white)로 이어지는 흐름은 백색의 역사를 설명하는 중요한 축이다.

특히 연백은 밝고 따뜻한 백색과 뛰어난 피복력 때문에 오랫동안 회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납 성분의 독성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이후 아연백과 티타늄화이트가 등장하면서 백색 안료의 역사 역시 화학과 산업기술의 발전과 함께 변화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백색의 역사는 결국 ‘어떤 물질을 사용해 흰색을 만들었는가’의 역사​다.

그러나 백색에는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호쿠사이의 파도에서 시선을 자연으로 옮겨보면 전혀 다른 백색의 계보가 나타난다.

종이의 섬유, 눈의 얼음 결정, 구름 속 물방울, 바다의 거품처럼 이 백색들은 특정한 흰색 색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물질과 공기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경계가 빛을 산란시킨다.

이것은 백색을 이해하는 두 번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가 흰색 물질의 역사라면 두 번째는 빛을 흰색으로 보이게 만드는 구조의 역사다.

이 두 역사는 오랫동안 서로 다른 분야에서 다루어져 왔다. 하나는 회화와 안료, 화학과 산업재료의 역사였고 다른 하나는 광학과 생물학, 재료공학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최근 구조색 연구는 이 둘을 다시 만나게 한다.

색채의 역사는 물질의 역사에서 구조의 역사로 확장된다

이러한 변화는 색채사를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색채사를 단순히 천연안료에서 합성안료로, 연백에서 티타늄화이트로 발전해 온 화학재료의 역사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종이와 직물, 유리와 금속, 표면의 광택과 질감을 통해 빛이 어떻게 반사되고 흩어지는지를 이용해 왔다.

호쿠사이의 파도에서 흰 종이는 단순한 ‘색을 칠하지 않은 부분’이 아니다. 종이 자체가 빛을 받아들이고 산란시키는 하나의 색채 재료다.

따라서 앞으로의 색채사는 ‘색을 가진 물질의 역사’와 함께 ‘빛을 다루는 물질과 구조의 역사’​를 포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색과 재료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만든다.

색은 물질 안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물질과 빛이 만나는 순간에 생겨나는 것일까.

호쿠사이의 종이에서 시작된 이 질문이 오늘날 나노구조와 다공성 고분자 연구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어쩌면 미래의 색채재료는 ‘어떤 색소를 넣을 것인가’보다 ‘빛이 어떻게 움직이도록 구조를 만들 것인가’​에서 출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참고·출처
Kyoto University, “White is more than a color: How nature inspired a new sustainable way to make white, water-repellent materials,” 9 September 2026.
Sivaniah, E. et al., “Foaming photopolymers as a high-resolution biomimetic printing platform,” Nature, 2026. DOI: 10.1038/s41586-026-10968-9.


그림: Katsushika Hokusai, The Great Wave, ca. 1830–32.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Public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