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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경기에서 공의 색은 선수의 움직임과 판단에 영향을 주는 시각적 요소다. 선수는 빠르게 움직이는 공의 위치와 방향, 속도를 순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공이 배경과 충분히 구별되지 않으면 움직임을 추적하거나 거리를 판단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조명의 밝기와 경기장 환경, 선수의 색각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2026년 8월 국제학술지 Sports Medicine에 발표된 연구는 크리켓 경기에서 사용하는 분홍색 공의 시인성을 분석했다. 크리켓(Cricket)은 영국에서 발전한 구기 종목으로, 야구와 유사하게 공을 던지고 배트로 쳐서 점수를 얻는다. 한 팀은 11명으로 구성되며, 타자는 공을 친 뒤 경기장 중앙에 설치된 두 위켓(Wicket) 사이를 달려 점수를 얻는다. 영국과 호주, 인도 등에서 인기가 높으며, 한국에서도 국가대표팀과 동호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경기 방식에 따라 몇 시간에서 최대 5일까지 진행되며, 낮과 밤에 걸쳐 열리는 주야간 테스트 경기에서는 분홍색 공을 사용한다.

앵글리아 러스킨대학교(Anglia Ruskin University), 라트로브대학교(La Trobe University) 등의 공동 연구진은 분홍색 공과 기존의 빨간색 공이 조명과 경기장 배경, 선수의 색각 특성에 따라 얼마나 잘 구별되는지 비교했다. 연구진은 같은 색의 공을 사용하더라도 모든 선수에게 동일한 시각적 조건이 제공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했다.

분홍색 공의 등장

크리켓은 전통적으로 낮에 빨간색 공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낮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주야간 테스트 경기가 도입되면서 조명과 경기 시간에 적합한 새로운 공이 필요해졌다. 빨간색 공은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식별하기 어렵고, 흰색 공은 장시간 사용하면서 표면이 오염되어 시인성이 떨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2015년 주야간 테스트 경기에 분홍색 공이 도입됐다. 분홍색 공은 자연광과 인공조명 아래에서 모두 잘 보이도록 고안됐다. 그러나 실제 경기에서는 해 질 무렵 공을 알아보기 어렵다는 선수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경기장의 잔디와 관중석, 하늘의 밝기가 시간에 따라 달라지면서 공과 배경 사이의 대비도 변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문제를 색채의 물리적 특성과 인간의 시각 특성을 함께 고려해 분석했다.

공의 색과 배경이 만드는 시인성의 차이

연구진은 영국 런던의 로즈 크리켓 경기장(Lord’s Cricket Ground)에서 낮, 해 질 무렵, 밤의 조명 조건과 경기장 배경을 측정했다. 또한 새 공과 사용한 공의 분광반사율을 측정하고, 공과 잔디·경기장 바닥·관중석·하늘 사이의 휘도대비를 계산했다. 휘도대비는 대상과 배경의 밝기 차이를 나타낸다. 같은 색의 공이라도 밝은 하늘 앞에 있을 때와 어두운 관중석 앞에 있을 때는 보이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공의 표면이 마모되거나 오염되는 과정에서도 반사 특성이 변한다. 연구 결과, 특히 사용한 분홍색 공에서 시인성이 낮아지는 조건이 나타났다. 일부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색각을 가진 관찰자에게도 공과 배경의 휘도대비가 낮게 계산됐다. 연구진이 비교한 조건을 종합하면 빨간색 공이 분홍색 공보다 상대적으로 일관된 시인성을 제공했다.

색각 특성에 따라 달라지는 공의 가시성

이 연구에서 주목할 부분은 선수의 색각 특성에 따라 공이 보이는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일반적인 색각을 가진 사람과 적색계 색각이상(protanomaly), 녹색계 색각이상(deuteranomaly)이 있는 사람의 시각 특성을 모형에 적용해 공과 배경 사이의 대비를 비교했다. 적색계 색각이상은 붉은색 계열을 구별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경우이며, 녹색계 색각이상은 녹색 계열을 구별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경우다. 두 유형 모두 색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며, 색을 구별하는 정도에는 개인차가 있다. 분석 결과, 적색계 색각이상이 있는 사람은 잔디나 관중석을 배경으로 분홍색 공을 식별하기 어려운 조건이 나타났다. 녹색계 색각이상이 있는 사람은 경기장 바닥을 배경으로 할 때 분홍색 공의 시인성이 낮아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색각이상의 정도가 심하다고 해서 공이 항상 더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배경에서는 적색계 색각이상의 정도가 심한 경우에 오히려 공과 배경 사이의 휘도대비가 높게 나타났다. 이는 색각 특성과 배경색의 관계에 따라 시인성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공의 시인성은 공 자체의 색뿐 아니라 경기장의 배경과 조명, 선수의 색각 특성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연구진은 모든 선수와 경기 조건에 일관되게 높은 시인성을 제공하는 공의 색을 선정하기 위해 이러한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잘 보이는 색과 공정한 경기 환경

스포츠에서 공과 유니폼, 경기장 바닥과 주변 배경의 색은 선수들이 움직임을 파악하고 경기 상황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시각 정보를 제공한다. 경기의 공정성을 고려할 때는 이러한 정보가 서로 다른 시각 특성을 가진 선수들에게 얼마나 명확하게 전달되는지도 살펴야 한다. 동일한 색의 공을 사용하더라도 선수의 색각 특성에 따라 공과 배경 사이의 대비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크리켓 이외의 종목에서도 중요하다. 축구에서는 선수들의 유니폼이 서로 구별되어야 하며, 테니스에서는 빠르게 움직이는 공이 코트와 주변 배경에서 잘 보여야 한다. 경기장의 조명과 광고판, 관중석의 색도 공이나 선수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종목마다 경기 방식과 관찰 거리, 공의 속도 등이 다르므로 각 경기 환경에 적합한 시인성 평가가 필요하다.

다만 이번 연구는 선수들의 실제 경기력이나 부상 위험을 측정한 실험은 아니다. 공의 분광반사율과 경기장 환경을 측정하고, 시각 모델을 이용해 공과 배경 사이의 휘도대비를 계산한 연구다. 따라서 특정 색의 공이 선수의 실책을 증가시키거나 경기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앞으로는 다양한 색각 특성을 가진 선수들을 대상으로 공의 추적 정확도와 반응시간, 경기 수행 능력을 직접 비교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색채디자인에서 공정성을 고려한다는 것

그동안 스포츠 색채는 팀의 정체성이나 시각적 구별, 관중과 방송 시청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다뤄져 왔다. 여기에 색각 다양성이라는 관점을 더하면 색채디자인의 평가 기준도 넓어진다.
경기 환경의 색을 선정할 때는 공이나 유니폼 자체의 색뿐 아니라 주변 배경과의 휘도대비, 자연광과 인공조명의 변화, 재료의 사용과 마모에 따른 색채 변화까지 고려해야 한다. 또한 평균적인 시각 특성을 기준으로 평가한 결과가 다양한 색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적용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번 연구는 스포츠 경기에서 색채 접근성을 고려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공의 시인성은 선수의 색각 특성과 경기장의 배경, 조명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공의 색을 선정할 때는 다양한 시각 특성을 가진 선수들이 실제 경기 환경에서 공을 얼마나 잘 식별할 수 있는지 함께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스포츠 경기의 공정성뿐 아니라 공공시설, 교통 정보, 디지털 인터페이스 등 다양한 색채디자인 영역에도 적용할 수 있다.


참고문헌
Allen, P. M., Runswick, O., Wilkins, L., Mann, D. L., Timmis, M. A., & Maule, J. (2026). Not so pretty in pink: Computational modelling of cricket ball visibility with colour vision deficiency. Sports Medicine.
La Trobe University. (2026). Cricket’s day-night pink ball not always so pret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