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Credit: Ed Cartledge, Sort of Films]
고대 로마의 리쿠르고스 컵에서 현대 나노광학까지, 빛과 물질이 만드는 색채

Photo credit: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4세기 로마에서 제작된 리쿠르고스 컵. 빛이 유리 표면에서 반사될 때는 녹색으로, 유리를 통과할 때는 붉은색으로 보인다. 사진: 대영박물관 소장품
약 1,600년 전 로마에서 제작된 유리잔 하나가 현대 과학자들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다.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리쿠르고스 컵(Lycurgus Cup)’이다. 이 잔은 빛을 앞에서 비추면 불투명한 녹색으로 보이지만, 뒤에서 빛을 비추면 투명한 붉은색으로 빛난다. 하나의 유리가 서로 다른 두 색을 나타내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 것이다.
2026년 10월 26일, 영국 셰필드대학교(University of Sheffield)는 이 유리의 색채 효과를 반복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제조법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고대 로마 유리의 성분과 제작기술을 조사하고, 현대 재료과학을 활용해 반사광에서는 녹색, 투과광에서는 붉은색을 나타내는 유리를 제작했다. 고대의 장인이 경험적으로 다루었던 색채기술을 현대 과학으로 다시 구현한 성과다.
신화가 새겨진 로마의 유리잔
리쿠르고스 컵은 기원후 4세기에 제작된 로마의 유리 공예품이다. 잔의 표면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라키아의 왕 리쿠르고스가 포도덩굴에 얽혀 고통받는 장면이 정교한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리쿠르고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 대항한 인물로, 그의 이야기는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이 맞이하는 파멸을 보여준다.
이 유리잔은 케이지 컵(cage cup) 또는 디아트레타(diâtreta)라고 부르는 고대 로마의 고급 유리 공예 형식에 속한다. 장인은 두꺼운 유리의 바깥 부분을 정교하게 깎아 인물과 포도덩굴이 잔의 몸체에서 떠 있는 듯한 입체적인 형태를 만들었다. 복잡한 조각기술과 특별한 색채 효과가 결합된 작품이다.
잔의 색은 조명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 외부에서 빛을 비추면 올리브색에 가까운 녹색이 나타나며, 내부나 뒤쪽에서 빛을 비추면 진한 루비색을 띤다. 고대 로마의 유리 제작자가 이러한 색채 효과를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고 의도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완성된 유리잔은 당시의 재료기술과 뛰어난 공예적 숙련을 보여준다.
유리 속 금과 은이 만들어내는 색채

Credit: David Heath, University of Sheffield
리쿠르고스 컵의 색채 변화는 유리 내부에 포함된 미세한 금과 은 입자에서 비롯된다. 이 입자들은 나노미터 규모로, 가시광선의 파장보다 훨씬 작다. 금과 은이 유리 속에서 매우 작은 입자를 형성하면 빛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유리와 달라진다.
빛이 금속 나노입자에 닿으면 입자 속 전자들이 빛의 전기장에 반응한다. 이때 특정 파장의 빛은 강하게 흡수되거나 산란된다. 이러한 현상은 금속 나노입자의 국소 표면 플라스몬 공명(localized surface plasmon resonance)과 관련이 있다. 입자의 크기와 형태, 금속의 조성, 주변 유리의 광학적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색도 달라진다.
리쿠르고스 컵에서는 빛이 유리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일부 짧은 파장대의 빛이 약해지고 붉은 계열의 빛이 상대적으로 많이 전달된다. 반면 외부 조명 아래에서는 빛의 산란과 반사, 흡수가 함께 작용하여 녹색으로 보인다. 이처럼 반사광과 투과광에서 서로 다른 색을 나타내는 현상을 이색성(dichroism)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유리의 색은 흔히 첨가된 금속 산화물이나 착색 성분의 흡수 특성으로 설명된다. 리쿠르고스 컵에서는 금속 나노입자의 광학적 특성과 유리 내부의 미세구조가 색채 형성에 관여한다. 눈에 보이는 녹색과 붉은색은 같은 재료가 빛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현대 과학으로 재현한 고대의 색
셰필드대학교의 리사 홀런즈(Lisa Hollands) 박사는 고대 로마 유리 전문가인 캐럴라인 잭슨(Caroline Jackson) 교수와 협력하여 리쿠르고스 컵과 유사한 유리의 제조법을 연구했다. 연구진은 고대 로마에서 사용했을 법한 유리의 기본 조성을 현대 재료로 재구성하고, 소량의 금과 은을 적절한 형태로 유리 내부에 형성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제작 과정에서는 원료의 조합과 용해로의 종류, 산소 농도 등을 다양하게 조절했다. 유리 속에 금과 은을 넣는 것만으로 원하는 색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속 성분이 녹은 유리 안에서 어떤 크기와 구조의 입자로 형성되는지에 따라 광학적 효과가 달라졌다.
여러 차례의 실험 끝에 연구진은 반사광에서 녹색을 띠고 투과광에서 붉은색을 나타내는 유리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이색성 유리의 재현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이번 연구는 원래의 유리잔과 유사한 색채 효과를 안정적으로 반복 생산하는 제조법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유리를 이용해 영국의 유리 예술가 엘리엇 워커(Elliot Walker)는 리쿠르고스 신화와 고전 조각의 형태를 결합한 현대 유리 조각을 제작했다. 작품은 2026년 11월 6일부터 15일까지 셰필드 밀레니엄 갤러리(Millennium Gallery)에서 열리는 행사에 공개될 예정이며, 이후 셰필드대학교 터너 유리박물관(Turner Museum of Glass)에 전시될 계획이다.
색은 물질과 빛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리쿠르고스 컵은 색채가 형성되는 조건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사례다. 유리잔의 재료와 형태는 그대로인데 조명의 위치가 달라지면 관찰자가 경험하는 색이 크게 바뀐다. 우리가 녹색 또는 붉은색으로 인식하는 것은 유리 속 금속 입자와 빛이 상호작용한 결과가 눈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물체의 색을 설명할 때는 흔히 표면이 어떤 파장의 빛을 반사하는지 살펴본다.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재료에서는 빛이 물질을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흡수와 산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또한 관찰자의 위치와 주변 조명에 따라서도 같은 물체의 색채 경험은 달라질 수 있다.
고대 로마의 장인은 유리와 금속을 다루는 제작 경험을 통해 독특한 색채 효과를 구현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그 현상을 나노입자의 구조와 빛의 상호작용으로 분석하고, 현대 유리 공예와 광학 재료의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약 1,60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두 제작기술은 색채가 재료의 특성과 빛의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는 공통된 원리로 연결된다.
리쿠르고스 컵의 녹색과 붉은색은 고대 유리공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색채를 이해하는 시야를 넓혀준다. 하나의 물질에서 서로 다른 색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색이 물체의 성질과 빛의 작용, 관찰 조건이 만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각적 현상임을 잘 보여준다.
참고자료
셰필드대학교. (2026, October 26). Technician cracks 1,600-year-old mystery to replicate Roman masterpiece. University of Sheffield.
Russon, M.-A. (2014, October 6). Romans used nanotechnology to turn Lycurgus Cup from green to red 1,600 years ago. International Business Times UK.
Zhu, et al. (2020). Gold and silver dichroic nanocomposite in the quest for 3D printing the Lycurgus cup. Beilstein Journal of Nanotechnology,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