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왜 파랗지 않았는가: 호메로스에서 놀란까지, 색채를 둘러싼 언어와 감각의 문제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화한 『오디세이』의 첫 이미지가 공개되자, 일부 관객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가 지나치게 어둡고 회색조에 가깝다고 반응했다.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자주색 튜닉, 눈부신 대리석, 푸른 에게해의 반짝임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 기대는 과연 고대 그리스의 색채 감각에 가까운 것일까. France Culture에 실린 글 「호메로스에서 놀란까지: 그들은 바다가 푸르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는 이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색채가 단순한 시각적 사실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 시적 상상력 속에서 구성되는 감각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유럽인이 가장 선호하는 색 가운데 하나는 파랑이다. 미셸 파스투로가 지적하듯, 파랑은 중세 이후 점차 긍정적 의미를 획득했고, 낭만주의 시대에는 감정과 내면, 무한과 동경을 상징하는 색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파랑은 놀라울 만큼 희미하게 나타난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하늘과 바다는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듯 ‘푸른색’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바다는 “포도주빛 바다”, “검은 바다”, “제비꽃빛 바다”로 등장한다. 아테나의 눈도 명확한 파랑이 아니라 푸른빛과 녹색, 회색, 호박색이 뒤섞인 듯한 ‘글라우코스’의 세계에 속한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인물은 19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고전학자였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다. 그는 호메로스의 방대한 시구를 분석하며, 고대 그리스인이 파랑을 거의 명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여기에서 한때 고대인은 파란색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등장했다. 니체 역시 『아침놀』에서 그리스인이 자연을 오늘날과 전혀 다른 색채로 보았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생물학적 결핍보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인이 파랑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파랑을 분류하고 말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들의 색채어는 현대의 색상 중심 체계와 다르게 작동했다. 색은 단순히 빨강, 노랑, 파랑처럼 나뉘기보다 밝기와 어둠, 광택과 흐림, 생명력과 물질감, 위험과 신성함의 감각을 함께 품고 있었다. “포도주빛 바다”는 바다가 붉다는 뜻이 아니라, 바다의 깊이와 어둠, 취하게 하는 힘, 인간을 압도하는 낯선 움직임을 표현하는 시적 언어다. “제비꽃빛 바다” 역시 색상표의 정확한 위치보다, 물결의 반짝임과 변화하는 표면을 불러내는 말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색채는 자연의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어떤 색을 볼 수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색을 말할 필요가 있었는가이다. 언어학자 기 도이처가 설명하듯, 색채어의 발달은 시각 기관의 진화보다 문화적 필요와 더 깊이 연결된다. 인간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차이를 자동으로 이름 붙이지 않는다. 사회가 구별할 필요를 느끼고,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특정한 색채어가 자리를 얻는다.

사피어-워프 가설이 제기한 언어 상대성의 문제도 이 논의와 맞닿아 있다. 언어가 세계 인식을 완전히 결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언어가 감각의 초점을 조정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어떤 언어가 노을의 보랏빛과 붉은빛 사이를 가리키는 섬세한 말을 갖고 있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황혼의 색채 변화를 더 민감하게 인식할 수 있다. 반대로 특정한 색 이름이 없다고 해서 그 색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색을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구분하지 않았을 뿐이다.

호메로스의 바다는 하나의 파란색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바다는 검고, 희고, 회색이며, 보랏빛이고, 포도주빛이다. 그것은 계절과 날씨, 항해자의 감정, 신들의 개입, 생존의 위협에 따라 달라지는 감각의 장이다. 『오디세이아』는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바다를 시각·청각·촉각·공포·매혹이 뒤섞인 공감각적 공간으로 만드는 시적 서사다.

그러므로 놀란의 회색빛 『오디세이』를 둘러싼 논쟁은 단지 영화 화면의 채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대를 어떤 색으로 상상해왔는지, 또 그 상상이 얼마나 근대 이후의 시각 문화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를 묻는 문제다. 우리가 기대하는 ‘푸른 에게해’는 고대 그리스인의 감각이라기보다 현대 관광 이미지와 고전주의적 미감, 낭만주의 이후의 파랑의 상징성이 뒤섞인 결과일 수 있다.

바다는 언제나 파랗게 존재한 것이 아니다. 자연으로서의 바다는 빛의 산란과 반사 속에서 푸르게 보일 수 있지만, 문화 속의 바다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어떤 시대의 바다는 포도주처럼 어둡고, 어떤 문학의 바다는 제비꽃처럼 흔들리며, 어떤 영화의 바다는 회색의 침묵으로 다가온다. 색채는 세계의 표면에 붙은 이름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고 기억하며 의미화하는 방식이다. 호메로스의 바다는 파랑의 부재가 결핍이 아니라, 다른 감각 질서의 표현임을 보여준다.

 


출처: Pauline Petit, “D’Homère à Nolan : ne voient-ils pas que la mer est bleue ?”, France Culture, Radio France, 19 June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