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 디자인이 색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
커피를 마시고 남은 찌꺼기는 짙은 갈색이다. 차를 우려낸 뒤 남은 잎에는 녹색과 갈색, 검붉은 색이 섞여 있다. 쓰임이 끝난 뒤에는 이런 색도 함께 버려진다. 다시 제품을 만들 때에는 대개 원래의 흔적을 지우고, 새 재료처럼 보이도록 표면과 색을 정리한다.
최근에는 이와 다른 방식도 나타나고 있다. 재생재료가 원래 가지고 있던 색과 질감을 그대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2026년 London Design Festival에서 소개된 After the Last Sip 프로젝트는 커피와 차를 마시고 남은 찌꺼기를 새로운 재료로 바꿨다. 디자이너들은 런던의 카페와 매장에서 버려지는 커피 찌꺼기와 찻잎을 모아 말리고 분쇄한 뒤 PLA와 혼합했다. 이렇게 만든 재료를 로봇 3D 프린팅에 사용해 가구와 조명, 오브제를 제작했다.
완성된 제품에는 재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커피 찌꺼기의 짙은 갈색, 찻잎의 어두운 색조, 작은 입자와 고르지 않은 표면이 눈에 들어온다. 3D 프린팅 과정에서 만들어진 층도 완전히 감추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기존의 산업제품과는 조금 다르다. 산업생산에서는 같은 제품이라면 가능한 한 같은 색과 표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얼룩이나 입자의 차이, 미세한 색 편차는 품질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줄여야 할 요소로 여겨졌다. 재생재료도 새 원료처럼 보이도록 색을 다시 입히거나 표면을 고르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After the Last Sip에서는 이런 차이를 그대로 사용한다. 커피에서 나온 재료는 커피의 색을 남기고, 차에서 나온 재료에는 찻잎의 흔적이 보인다. 색과 표면이 재료의 출처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커피의 갈색도 이때는 단순한 브라운이 아니다. 한때 커피였던 재료가 다른 제품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은 입자와 고르지 않은 표면도 같은 역할을 한다.
같은 시기 London Design Festival에서 소개된 Colour Lab: From Waste to Value에서는 폐직물에 남아 있던 색을 다시 활용했다. 사용이 끝난 직물을 잘게 분쇄하고, 그 안에 남아 있는 색을 안료와 염료, 잉크의 재료로 바꾸는 연구다. 이미 존재하는 색을 없앤 뒤 새로 칠하는 대신, 이전 재료의 색을 다시 꺼내 쓰는 방식이다.
After the Last Sip에서는 커피와 차의 색이 새로운 제품의 표면으로 이어지고, Colour Lab에서는 폐직물의 색이 새로운 안료가 된다. 두 사례 모두 재생 과정에서 기존의 색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변화는 CMF 디자인에서도 눈여겨볼 만하다.
CMF는 Color, Material, Finish, 즉 색과 재료, 마감을 함께 다루는 디자인 영역이다. 제품을 기획할 때 원하는 이미지를 정하고, 그에 맞는 색과 소재, 표면을 선택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자동차의 외장색이나 전자제품, 가구의 색이 대표적이다.
재생재료를 사용하면 조금 다른 선택이 가능해진다. 디자이너가 먼저 색을 정한 뒤 재료를 맞추는 대신, 재료가 이미 가지고 있는 색과 질감을 살펴보고 그것을 제품에 활용할 수 있다.
재활용 유리에는 옅은 녹색이나 갈색이 남을 수 있고, 재생 플라스틱에는 여러 색의 입자가 섞이기도 한다. 폐목재는 나무마다 색과 결이 다르고, 커피 찌꺼기가 들어간 재료에는 어두운 입자가 그대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런 차이를 줄이는 데 많은 공정이 필요했다. 지금은 그 차이 자체를 재료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지속가능한 색채디자인은 특정한 ‘친환경 색’을 고르는 일과는 다르다.
녹색이나 베이지색이 자연을 떠올리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색을 사용했다고 해서 제품의 생산과정까지 지속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회색이나 갈색, 작은 얼룩이 남은 표면이 재생재료를 덜 가공한 결과일 수도 있다.
색을 볼 때 재료와 공정을 함께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원료를 사용했는지, 색을 만들기 위해 별도의 안료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균일한 표면을 만들기 위해 추가 가공이 필요했는지, 사용이 끝난 뒤 다시 재활용할 수 있는지도 색채디자인과 연결된다.
기존의 CMF가 Color, Material, Finish를 중심으로 했다면, 지속가능성을 고려할 때에는 여기에 공정과 제품의 수명주기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색을 정하는 일과 재료를 선택하는 일, 만드는 과정과 사용 이후의 처리까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례를 보고 재생재료는 갈색이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After the Last Sip의 제품이 갈색을 띠는 것은 커피와 차 찌꺼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른 재료를 사용하면 색도 달라진다. 폐직물이라면 기존 직물의 색이 남을 수 있고, 재생 플라스틱은 여러 색이 섞인 표면을 만들 수 있다. 재활용 유리도 원료에 따라 녹색이나 갈색, 투명에 가까운 색을 띤다.
중요한 것은 재생재료의 색을 반드시 새것처럼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재료가 가지고 있던 색과 입자, 결을 그대로 남겨두면 제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색이 재료의 과거를 보여주는 단서가 되는 셈이다.
커피 찌꺼기의 갈색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핵심은 갈색이 아니다. 재생재료가 가지고 있던 색과 흔적을 감추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디자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지속가능한 색채디자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참고문헌
Innovus Lab. (2026). After the last sip. https://innovuslab.uk/exhibitions/after-the-last-sip
London Design Festival. (2026). After the last sip. https://londondesignfestival.com/activities/after-the-last-sip
Meyrick, T., Perryman, L., & Kay, J. (2026, September). Colour Lab: From Waste to Value [Exhibition]. London Design Festival 2026, Switchboard Studios, Waltham Forest, London, United Kingdom.
RMIT University. (2026). Chroma Waste Lab: Reimagining colour, from invisible supply chain to accountable, circular practice. https://www.rmit.edu.au/about/schools-colleges/college-of-design-and-social-context/research/chroma-waste-lab